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2차 북벌 (문단 편집) ==== 4중전회 예비회의 ==== 한편 장제스와 껄끄러운 상태였던 서산파는 장제스와 왕징웨이가 합작함에 따라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이 때문에 장왕합작을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특히 특위가 붕괴됨에 따라 특위에서 제정한 3전대회 선거법과 조직법이 파기되면 서산파의 정치활동엔 엄청난 타격이 있을 터였다. 이 때문에 서산파는 3전대회 개최에 집착했다. 하지만 서산파의 정통성이 인정되면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한 광동파가 3전대회를 막고 4중전회 개최를 주장하며 서산파를 견제하려 했고 이를 위해 장제스와의 동맹을 결정하였다. 궁지에 몰린 서산파는 광서파와 연합하였고 이를 위해 탕성즈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서산파의 상황은 좋지 않아서 11월 9일 서산파와 가까운 [[쉬충즈]] 등과 서산파의 여러 핵심인물들이 당무시찰을 위한 일본파견이라는 명목으로 제거되었고 장제스는 복직을 거절하고 평당원의 자격으로 당무 발전에 전력하겠다는 표면적인 입장과는 다르게 원로들과 접촉하며 4중전회를 개최하고 여기에서 장제스의 복직을 정식제안하기로 했다. 서산파는 허잉친에게 반장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허잉친은 이를 당연히 거절했고 거기에 동맹세력인 광서파와 관계도 그렇게 밀접하다고 할 순 없었다. 광서파는 서산파를 원로로 어느 정도는 존경했으나 장제스의 재집권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서산파에 대한 존경만으로 장제스에게 대놓고 개길 만큼 밀접하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광서파는 탕성즈 토벌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어서 장제스에게 맞설 여유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상하이, 난징에는 장제스 복직에 완강히 저항할만한 세력이 더 이상 없었다. 이에 장제스는 은거를 계속하겠다는 초기 입장을 버리고 특위 취소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장왕합작을 공식선언하고 4중전회 개최를 요구했다. 특위가 장제스에게 그렇게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배려한 부분이 있는데도 장제스가 특위 취소라는 강경한 주장을 한 배경에는 장제스가 자신의 총사령관 직위가 특위에게 간섭받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특위 체제를 기반으로 광서파와 서산파가 성장하면 자신에게 위해가 될 것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기반을 일찍이 흔들어놓고자 왕징웨이와 입장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27년 11월 [[장파쿠이]]와 황기상이 장제스의 복직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장황사변]]이 발생하는데 이에 대한 광동파의 연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으나 장제스는 자신의 복직을 위해 광동파를 무리하게 비호하였다. 이에 광서파 등이 반발해 정국은 혼란해졌다. 그러던 중 발생한 11월 22일의 탕성즈 토벌 승리기념 대회에서 서산파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시가 행진에 군경이 발포하여 사망자가 발생하는 소위 난징 참안이 발생하자 서산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나중에 서산파는 이를 장제스의 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서산파는 사건의 신속한 조사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당의 단결만을 위할 뿐 개인적 야심은 없다고 호소했으나 광동파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고 특위는 더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12월 3일 장제스의 자택에서 30여명의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감찰위원외 모여 4중전회 1차 예비회의가 소집되었고 서산파 위원 10명이 직권정지와 행동감시 처분을 당했다. 이로써 특위는 사실상 마비되었다. 왕징웨이는 이날 특위만 취소되면 광동 측 위원들이 난징으로 가서 4중전회에 참석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12월 4일 2차 담화회에서 특위 취소를 확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